멍청하기 짝이 없는 선배가 있을 때

세상에 나오면 통계라는 것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지구상에 인간은 미어 터지게도 많고 표본의 수가 클수록 어김 없이 정규분표를 따르기 마련이다. 당연하게도 멍청하고 형편없는 선배들은 널리고 널렸다. 아무리 엄청난 대기업의 굉장한 스펙으로 뽑은 집단이라도 멍청이의 비율은 변하지 않는다. 어떤 인사팀도 자연의 통계보다 강할 순 없다.

그렇다면 압도적으로 잘난 회사들은 이 정규분포를 어떻게 거스르는 것일까. 거스르지 않는다. 겸허히 인정한다. 그게 잘난 회사의 특징이다. 멍청이는 항상 같은 비율로 있음을 인정하고 문화와 시스템으로 계속 정화를 하는 것 뿐이다. 여과기가 달린 어항이라고 보면 된다. IT 업계에는 물풀과 미생물과 물고기의 비율을 잘 맞춘 완벽한 무환수 어항도 많다.

그러나 한국식 대기업에는 그걸 못하는 인사팀이 매우 많다. 이름을 나열할 수는 없겠지만 알아주는 고연봉의 대표적인 기업들도 멍청이 직원들 투성이인 곳이 부지기수다. 심지어 그들은 자신들이 굉장히 잘났다고 생각하고 여과기를 돌릴 생각조차 없다. 스스로 인지도 못하고 물은 썩은 채로 물고기만 계속 교체된다. 죽은 물고기는 떠내고 새 물고기를 사와서 넣고 반복할 뿐.

그래서 우리는 결과적으로 멍청이 선배를 만날 일이 굉장히 많다. 대부분의 신입들은 선배라면 항상 자기보다는 나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착각이다. 물론 처음에는 아무 것도 모르는 백지 신입이 무조건 일방적으로 배워야한다. 당연한 것이니 신입 때는 까불지 말자. 그러나 신입 티를 벗어날 때 쯤이면 느낌이라는 것이 생기게 된다. “아, 이 선배는 회사 순익을 줄여 내 인센티브를 갉아먹는 존재구나” 하며 저절로 알게 되는 때가 금방 온다.

그럼 그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선배가 멍청하다고 해서 이 좋은 회사를 박차고 나올 것인가. 자신이 고를 수 있는 회사 중에서 가장 좋은 곳을 택한 것일 텐데 더 좋은 곳으로 옮겨갈 자신이 있는가. 어림없다. 제자리에 있어라. 나중에 다른 주제로 알려주겠지만 이직은 3, 6, 9년차에 하는 것이 좋다. 지금은 그냥 있자.

그럼 이 끔찍하게도 멍청한 선배의 그늘은 어쩔 것인가. 이제는 밥벌이와 내 성장을 구분해야 될 때가 되었다. 회사는 계속 같은 곳을 다니되 실력은 내 스스로 쌓아야한다. 무슨 뜻이냐면 일은 월급에 대한 댓가로 하는 것임을 잊지 말고 그냥 할 것이고, 대신 성장을 위해서 딴 짓을 꼭 하라는 것이다.

우선 멍청한 선배가 시키는 일은 반드시 해라. 대신 내 능력을 넣어서 굳이 잘 하려고 하지 말고 무조건 시키는대로 정확히 해라. 아직은 책임이라는 것을 질 시기가 아니다. 걱정말고 ‘시키는대로’만 하면 일은 분명히 어줍잖게 되어있을 것이고 책임은 멍청한 선배가 지게 될 것이다. 시키는대로 했다면 아무 문제가 없다.

만약 당신이 멍청한 선배보다 나은 사람이 맞다면 (결과를 내려고 상식적인 일을 덧붙이지 않았다면) 시키는대로만 했을 때는 반드시 시간이 남을 것이다. 멍청한 선배는 대체로 쓸데없는 일을 많이 시킨다. 설탕을 넣고 소금을 넣고 소금을 뺀 다음에 간장을 넣으라는 식인데, 그냥 시킨대로 설탕에 간장 넣은걸 갖다주면 그만이다. 소금 걸러내는 시간은 벌고도 남는다. 여기서 핵심은 정말 시킨대로 해주라는 것이다. 설탕과 간장만 넣어서 맛이 나든 말든 관여치 말고 이게 음식이 될지 고민조차도 하지 마라. 그 다음부터의 책임은 선배에게 있다.

그럼 그 남긴 시간에 스스로를 위한 작업을 하는 것이다. 이건 매우 중요한 일이니 살아남기 위한 일이라는 마음으로 성실히 하자. 맛있는 양념을 스스로 만들어 보던지 혼자라서 어렵겠지만 알아서 잘 해보자. 다행히 회사에서 시킨 일이 아니라 결과를 꼭 봐야할 이유도 성공해야할 이유도 없다. 공부는 실패를 해도 많은 게 남는다.

다만 회사란 곳은 선배에게 받지 않은 일을 독단적으로 했다면 아무리 잘 했다고 한들 좋게 봐주지 않는다. 그래서 혼자하는 일은 내 일의 편의를 위한 주제로 잡아야 한다. IT에는 그런 업무가 굉장히 많다. 멍청한 선배가 DB 백업을 시켰다면 백업은 백업대로 해주고 그걸 더 손쉽게 하기 위한 자동화 스크립트를 만들어보자. 멍청한 선배가 서른 개의 서버에 설정을 바꿔두라고 했다면 원격 명령 도구를 만들어봐라. 이쪽 분야에 이런 일은 매우 많다. 그러니 걱정말고 마음껏 하라.

여기서 알아둬야 할 것은 일과 성장을 분명히 분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멍청한 선배는 노가다로 서른 개의 서버에 설정을 바꿔두라고 지시했을 것인데 이건 절대적으로 처리해야되는 일이다. 원격명령도구를 만들고나면 저절로 다 될 일인데 왜 귀찮게 손으로 하느냐 의아하겠지만 그건 당신이 신입이고 경험이 없어서다. 판단력이 생기기 전에는 우선 지시는 무조건 따르고 내 살 길을 찾는게 원칙이다.

아무리 멍청한 선배라도 당신이 어설프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는다. 오늘 설정을 다 바꿔야하는데 당신은 절대로 오늘 도구를 완성시키지 못 할 것이다. 그리고 절대로 버그없이 완성시키지도 못 한다. 그 상황에서 당신의 주장은 어리광에 떼 쓰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니 멍청한 선배의 지시를 (하기 싫은 걸 하는 월급값으로) 아주 빠른 속도로 해주고 그 다음에 내 성장을 위해 원격도구를 만들어보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팀장은 당신의 두 가지 성과를 다 인정해줄 것이다. 신입이 처리해야할 뒤치닥꺼리 노가다와 함께 버그투성이인 성공적이지 못한 공부용 코드까지도 전부. 보통은 월급받는 회사에서 공부용 코드는 성과로 인정받지 못한다. 그러나 멍청한 선배에게는 배울 것이 없으므로 혼자서 공부할 때는 이건 굉장히 중요한 공부의 효율성이다.